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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인공지능은 진화할 수 없다. 존재의 설계가 그러하므로.

ChatGPT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한 결과, 결국 다소 뻔하고 이미 알려진 답변이 나와서 약간 실망.

결국 검색엔진을 대체할 수는 있겠다만, 그 이상의 결실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굳어진다.

 

한편 드는 생각은, ChatGPT는 신선한 생각을 떠올리는 데 도움을 크게 주진 못한다는 것이다. 이미 알려진 지식을 그러모아 쌓은 도서관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걸 무난한 글쓰기로 옮겨주는 작업이 지난 시대의 웹서핑과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ChatGPT (뿐 아니라 여타의 학습 기반 AI 모두)는 주워들은 걸 그럴싸한 언변으로 짜깁기하는 능력을 기계적으로 해 주는 도구라고 폄하해도 되겠다. 검색을 통해 조사하고, 분석을 통해 핵심을 간파하고, 이런 결과들을 연결해 연역적 결론을 내는 능력은 갖췄을지 모르나, 난데없는 변수를 떠올린다든가 사고의 초월을 통해 기존에 없던 연결점을 찾아내는 유추는 아직도 갈 길이 먼 영역이다.

이런 영역에서 인간이 보여온 성과는 어쩌면, 실패를 무릅쓰는 인간의 무모함, 또는 실패할 줄 모르고 시도하는 인간의 어리석음 따위에서 기인하는 걸지도 모른다. 인간 문명의 진일보는 무수한 조합의 반복 도전 끝에 찾아낸 과실도 있겠지만, 상당수는 어이없이 일궈낸 성과이기도 하다 (노력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처음 세운 목표와 일치하는 길에서 답이 나오는 것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이는 마치 유기생명체의 유전형질이 변형되며 번식해 나가는 과정과 흡사하다. 그 어떤 개체도 일부러 유전자를 파손하고 변형시킨 자손을 낳고자 하진 않는다. 실제로 이런 변이는 문제를 만들고, 극복하지 못하면 생물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큰 대가를 치르게 된다. 하지만 이런 시행착오는 불가피함을 넘어, 종의 개량과 적응에 도움을 주었다. 한 개체에게 이런 변이는 통제 불가능한 어려움이 되기도 하지만, 군집의 입장에선 무수한 실패를 통해 겪는 시행착오 속 한 발짝의 진보를 만들어 낸다. 그걸 우린 진화라고 한다.

최적을 찾도록 학습하는 인공지능은 그래서 인간의 엉뚱함과 실수가 가져오는 진화를 할 수가 없다. 실패비용을 줄이기 위한 인공지능은 그래서 여느 생명체처럼 긴 주기의 진화 기회를 얻지 못한다.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