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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 여긴 어디

놀 수 있어?

평소보다 조금 이른 퇴근길이었다.
그래서 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 이것저것 장을 보고, 결국 또 6시 부근에 집에 다다랐다.
장바구니를 들고 건물 입구로 들어오는데,  안뜰쪽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린다.

안쪽 문을 열려고 다가가는 내 앞 담장 너머로 불쑥 머리가 보인다. 유주보다 한살, 두살 어릴까, 조그마한 여자아이가 난간을 딛고 올라서서 날 바라본다. 무언가 스웨덴어로 분명 내게 말을 걸길래, 헬로우 하고 부드럽게 인사를 했다.
또 뭔가를 말한다. 뭔가 담장 너머로 떨어뜨려 주워달라는 걸까 싶어 "응?"하고 답했더니, 이번엔 영어로 조그맣게 말을 건다. 손을 만지작거리며 약간 망설이는 듯, 수줍은 듯.

"Can you play?"

얼마나 심심했으면, 담장 너머 옆 동의 생판 모르는 동양인 아저씨한테 '놀 수 있어요?'라고 물어볼까. 순간 떠오른 모습은, 하교버스에서 내려 함께 걸어돌아오면서, 학원에서 함께 돌아오면서 놀이터 근처를 지나면 늘 '놀 수 있어?'라고 묻던 작은 소녀였다.
시간이 모자라 정 안 되겠으면, 단지 바깥을 두르는 산책길이라도 함께 걷자며 어떻게든 귀가 시간을 늦추던 그 꼬마였다. 배고프고 쉬고 싶지 않나, 싶어서 늘상 빨리 집으로 들어가자 꼬드겼던 나는 그 보석같이 소중한 시간을 잘 몰랐다. 매일 악다구니 같은 삶의 쳇바퀴에 몸과 마음이 매여서, 꼬마가 재잘재잘 나뭇잎 이야기 하는 걸, 개미랑 노는 걸, 바람에 실려오는 웃음 소리를 놓치곤 했었다. 이역만리 독거생활 중에 만난 한 어린 소녀의 모습에서, 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던 나의 그 꼬마를 순간 만났다.

"아... 미안해. 지금 저녁 요리해야 하거든."

손에 든 장바구니를 들어보이며 난 양해를 구했지만, 사실 그 꼬마와 어찌 놀아야 할 지 몰라서, 또 그 부모가 (자기 딸이랑 노는) 날 어찌 볼 지 두려워서 슬금슬금 피하고 말았다.

내게 도움을 청하듯 놀아달라고 부탁하던 소녀는 저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문도 낑낑대며 겨우 여는 아이가 어떻게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집으로 들어와 장바구니를 풀며 밖을 내다보니, 곧 다른 아이와 놀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동생일까. 아깐 어쩌다 혼자 나와 나에게 놀자고 청했던 건지.


저 마당에서 나와 함께 놀았던 그 꼬마들이 오늘따라 더 그립다.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았다. 추운 날 속에 서로 잡기놀이만 해도 즐거웠던 건, 우리가 그런 사이였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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