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Life

배꼽 빠진 소년 이야기

옛날에 한 우울한 소년이 있었어.

어때, 시작부터 우울하지? 하지만 이야길 들어보면 더 우울할 거야.

그 소년도 한 때 열심히 살아보려 노력했어. 하지만 늘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았지.  맑은 날에도, 흐린 날에도, 비오는 날에도, 눈오는 날에도. 심지어 집에 가만히 있는 날에도 그는 울적한 일이 생겨났어.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의 옆집에 한 가족이 이사를 왔어. 그 집엔 소년 또래의 여자아이가 있었지. 소녀는 마당에 서서 바라보는 소년에게 인사를 건넸어.

"안녕!"

소년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떨궜지. 소녀는 이상하다 생각하며 소년에게 물었어.

"왜 그리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니? 오늘 하늘을 좀 봐. 정말 신나도록 맑고 아름답지 않니?"

"아니, 오늘은 또 우울한 날이 될 거야."

"왜 그렇게 생각해? 아직 네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난 맑은 날에는 나 혼자 빨갛게 햇볕에 타서 고생하고, 흐린 날에는 나 혼자 추워서 덜덜 떨고, 비가 오는 날에는 모두 같이 물놀이를 해도 혼자 진흙 구덩이에 빠지고, 눈 오는 날에는 나 혼자 엉덩이가 깨져. 뭘 해도 난 우울한 일이 생겨."

"그럼 우리 뒷마당으로 놀러와 봐. 내가 재미있는 걸 보여줄께."

우울한 소년은 갈 생각이 그다지 없었지만, 소녀가 손을 잡아끄는 바람에 안 넘어지려고 버둥대며 결국 뒷마당으로 함께 갔어.

 

소녀네 집 뒷마당엔 아무 것도 없었어. 아니, 뭔가 있었어. 세상에, 아주 큰 뭔가가... 거위다!

집 지키는 덴 개보다 거위가 탁월하다는 건 들어본 적 있지? 커다란 두 날개를 퍼덕이며 거칠게 꽥꽥대는 소리, 그리고 위협적으로 쪼아대는 큰 부리에 걸리기라도 하면 아마 거위가 악어보다 무서워질 지도 몰라. 그리고 거위는 자기 영역을 침범한 상대를 절대 가만 두지 않는대. 그러고 보니, 소년은 침입자가 되었네?

달려드는 거위, 그리고 놀라서 튀어나올 것 같은 눈으로 도망가려는 소년을 보며 소녀는 갑자기 깔깔대며 웃었어. 그 모습을 보자 소년은 울고 싶어졌어. 하지만 우는 일이랑 도망가는 일을 동시에 하기 어렵잖아? 뒷마당을 빠져나와 길을 달리며 우는 소년과 뒤꽁무니를 바짝 좇으며 울부짖는 거위, 그리고 그 뒤를 따라가며 배를 잡고 웃는 소녀. 이를 본 소년의 부모님도 그만 웃음보가 터지고 말았어. 이삿짐을 정리하던 소녀의 부모님도 웃음보가 터졌지. 이웃 주민들도 내다 보고는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어. 온 마을 사람들이 배를 잡고 데굴데굴 바닥을 구르며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지.

 

바로 그 때 거위가 좇아 달리길 멈추고 주변을 돌아봤어. 그리고는 갑자기 제 배를 움켜잡고 웃기 시작했어. 배를 잡고 웃는 거위라니! 이런 광경을 본 소년은 그야말로 오랜 세월만에 웃음이 터졌어. 소년도 배를 잡고 구르며 깔깔깔 웃기 시작한 거야. 온 마을엔 깔깔대는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가득했지.

그 때 희한한 일이 벌어졌어. 웃고 있던 모두의 배꼽이 퐁 하고 튀어나온 거야. 웃고 웃고 웃다 보면 정말로 배꼽이 튀어나온다니까? 숨도 못 쉬고 뻘개진 얼굴로 웃던 윗집 아저씨도, 숨이 차서 혀를 내두르며 웃던 옆집 누나도 모두 배꼽이 하늘 높이 날아 길 건너로, 이웃집으로 튀어나갔어. 세상에, 마을 위로 수백개의 배꼽이 서로 튀어오르는 광경이라니!

그 중 하나의 배꼽이 거위의 큰 입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어. 웃느라 정신이 없던 거위는 제 입 속으로 배꼽이 들어온 줄도 몰랐거든. 그래서 꿀꺽 삼켜버릴 뻔 하다가 가까스로 목구멍에서 튀어나왔어. 그 바람에 거위는 깜짝 놀라 웃음이 딱 멈추었지. 거위가 큰 꽥꽥 웃음을 멈추고 나니까 사람들도 정신이 번쩍 들어서 하나둘 웃음을 멈추는 거야.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년이 웃음을 멈췄을 때, 그들은 다같이 뭔가 허전한 걸 느꼈어. 바로 배꼽이 사라져 버린 거지!

 

사람들은 모두 제 배를 더듬어 보고는, 혼비백산했어. 내 집 앞 마당, 뒷마당, 이웃집 마당, 지붕 위, 길 가 풀숲, 사방을 뒤지고 다녔지. 사람들이 찾은 배꼽은 자기 것이 맞는진 몰라도 일단 끼워넣었어. 배꼽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보단 낫잖아? 근데 거위도 제 배를 보더니 깜짝 놀라 배꼽을 하나 주워 끼워넣었어. 자 그럼 이제 모두 배꼽을 되찾은 건가?

아니, 단 한 사람, 이 일마저 울적한 일이 되어 버렸다고 낙담했던 그 소년은 배꼽을 되찾지 못했어. 마을 곳곳을 샅샅이 뒤져봤지만 끝내 남은 배꼽 하나를 발견하지 못했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시냇물에 떠내려 가기라도 한 걸까?

 

소년은 이후 배꼽을 되찾기 위해 큰 결심을 했어. 우울한 모습을 버리고 사람들을 마구 웃겨주는 사람이 된 거지. 사람들이 너무 웃겨서 데굴데굴 구르다가 배꼽이 튀어나오면, 잽싸게 낚아채서 자기 배에 끼워넣으려는 거야. 그럼 배꼽을 잃은 그 사람은 또 다른 사람을 웃겨서 배꼽을 빼앗고, 또 다른 사람이 배꼽을 빼앗기고... 그래서 우리 인류는 계속 서로 배꼽을 빼앗으려고 웃기고 웃기고 더 웃기려는 전쟁을 시작하게 됐어. 바로 딱 한 개 모자라는 그 배꼽 때문에 말이야!

 

근데 그 사라진 배꼽 하나는 대체 어디로 간 걸까? 혹시 알고 있는 것 있어?

 

사실 말이야. 거위는 배꼽이 없어. 거위는 사람들이 웃으니까 함께 따라 웃었던 것처럼, 사람들이 끼워넣으니까 저도 배꼽이 있는 줄 알고 끼워넣었던 거야.

그 배꼽 달린 거위는 지금도 잘 살고 있을까? 이 모든 배꼽 전쟁을 일으킨 그 뒷마당의 거위 말이야.

 

'Life'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핸드폰으로 전기차가 굴러갈까  (0) 2021.09.06
포털 뉴스와의 작별  (0) 2021.08.31
마음 방울 이야기  (1) 2021.08.29
아내와의 이별  (0) 2021.08.25
수박의 미용 효과  (0) 2021.0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