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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마음 방울 이야기

제 몸 하나만 생각하던 한 사내가 있었다.

나이가 들고 짝을 만나 아이를 낳았다. 생전 아이를 그처럼 가까이서 본 적 없던 그는 작은 생명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그는 비록 성숙한 인격에 이르진 못했지만, 제 피를 나눠받은 아이를 보며 정성껏 양육했다. 아빠가 된다는 무게는 즐거운 책임감이었다.

아이는 올곧게 자라났다. 여느 아이들처럼 떼를 쓰기도 하고 말썽을 피우기도 했지만 아빠는 그걸 대부분 받아주며 늘 아이편에 서 주었다. 집안의 어른들은 자라나는 아이를 빛나는 보석같이 귀히 대하며 됨됨이를 가르쳤다. 아이는 머지 않아 동생을 갖게 되었고, 큰 샘을 내지도 않으며 어른스럽게 보살피기도 하는 그릇을 지녔다.

아빠는 나이가 들어갔다. 보통의 배경과 보통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세상은 그에게 늘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특별히 고난을 겪지는 않았지만, 사람마다 지닌 인내심의 차이 때문에 아빠도 곧잘 미숙한 성품이 삐져나왔다.

이는 종종 가족들에게 불똥을 튀게 했다. 회사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고, 주변의 인연이 속을 뒤집는다고, 운동부족의 몸이 여기저기 쑤신다고, 스스로 게으름 피워 시간을 낭비했다는 핑계로 함께 사는 가족을 바늘방석에 올려놓곤 했다. 그는 뉘우침과 사과가 재빠른 솔직한 인간인 편이었지만, 빈번한 난폭함은 평생을 약속한 배우자나 혈육인 자식들에게도 깊은 피로를 쌓게 했다.


어느덧 아이는 십대 중반을 넘어섰다. 남보다 다소 늦추긴 했지만 사춘기도 찾아왔다. 그리고 아이는 아빠에게 말했다.

   "저는 이제 가볼께요."

   "어딜 가니? 아빠랑 좀 놀래?"

   "죄송한데 아버지랑 놀긴 어렵겠어요. 저는 제가 행복한 방법을 찾아가려고요. 그 동안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빠는 최선을 다해 아이의 마음을 돌리려 했지만 소용 없었다.

   "아버지, 저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잘 알아요. 제가 태어났을 때 제 안엔 아버지로부터 받은 마음 방울이 수백개 있었죠. 모두 제가 그토록 행복한 아기가 될 수 있게 해 준 것들이었어요.

그리고 제가 첫 뒤집기를 하고, 뒤로 기다가 앞으로 기어가게 되고, 잡고 일어서고, 걸음마를 하고, 뛰기 시작하고, 처음 말을 했을 때 언제나 아버지는 제게 최고의 칭찬과 격려를 해 주셨어요. 그 때마다 제 안엔 마음 방울이 수십개씩 생겨났고요. 그 많은 방울들은 제가 어린이집과 유치원,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항상 자신감 넘치고 당당하게 세상을 바라볼 용기를 줬어요. 제 뒤엔 제게 언제나 마음 방울을 만들어 주는 아버지가 계셨으니까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저는 그 마음 방울들을 하나씩 잃어야 했어요. 즐거운 저녁 식사 중 갑자기 화를 내실 때, 동생이 잘못했는데 공평하게 대하신다며 억울하게 저까지 혼내실 때, 제가 무서워하는 순간 모질게 혼자 버려두실 때, 어려워하는 수학문제 도와주시다가 화를 내며 나무라실 때, 마음이 힘들어서 소리를 내거나 손발톱을 뜯는데 한심하게 바라보며 경멸하실 때, 영화가 그토록 좋고 마술이 그토록 좋아 좀 더 보고 배우고 싶은데 쓸데 없는 시간 낭비라며 화내실 때, 등이 아파 구부리고 겨우겨우 그 많은 숙제를 해내고 있는데 연필 똑바로 잡고 고개 빳빳이 들지 않는 게 마음에 안 들어 비난하실 때, 제 뜻대로 자라나지 않는 무릎과 발목으로 열심히 걷는 제게 모자란 사람 취급하실 때,

그 때마다 저는 그 순간을 이겨내려고, 난 행복하고 사랑받는 아이라는 걸 잊지 않으려고 그 마음 방울들을 하나씩 터뜨려 써야 했어요. 그러지 않으면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이 두려웠거든요.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써 나가며 오늘에 이른 거예요."

아빠는 참담한 마음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물었다.

   "그럼 이제 그 방울들은 얼마나 남았니? 다 사라진 거니?"

아이는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지는 않아요. 한 네 개 정도 남아있어요. 그러니 가끔 안부 여쭙고 찾아오기도 할께요. 저 어릴 때 정말 헌신적으로 잘 해 주셨잖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아이는 문을 닫고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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