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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죽음의 방관

보통 나의 게으름은 나름의 합리화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마땅한 이유가 없어서 훗날 돌아볼 때 나조차 납득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우리집 베란다에서 싱싱한 연초록빛 향을 풍겨주었던 율마는 제법 마음에 들게 잘 키워냈던 녀석이었다. 혹시 외국으로 이사가더라도 이 녀석은 누군가에게 입양시키기 수월할 것이란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꽤나 애정도 있었다 할 수 있겠다.

그러던 율마가 어느 날부터 한쪽 면이 연노랑으로 물들기 시작했고, 점점 번져가는 마름병의 모습은 꽤 긴 시일 내가 문제를 인식하게 했다. 당시 분갈이를 조만간 해줘야겠다 생각을 떠올리곤 했으니까. 내게 그 시기 아주 바쁜 일이 많았던 것도 아니었다. (작년에 내가 바빠봤자 뭘 얼마나 그랬겠는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율마가 완전히 적황색으로 말라죽는 순간까지 내가 아무 조치도 해주지 않았던 까닭을. 아니, 까닭이 있기나 했던가? 내 분갈이에도 죽어나갔던 돈나무들이 생각나 손조차 대고 싶지 않았던 걸까.

멍칠이를 보내던 날처럼, 계속 이어질 고단함의 핑계도 없었다. 아버지를 보내고 난 후처럼, 어차피 의료쟁송을 해도 아버지가 돌아오시진 않는다는 낙담도 아니었다.
율마는 신호를 보내줬고, 난 그걸 무심히 방관했다.

그가 목소리를 가졌더라면, 눈빛을 가졌더라면, 내게 크나큰 실망과 원망을 마지막 순간까지 보냈을 것이다. 그 때에도 나는 그 녀석을 외면하며 숨이 끊어지는 날을 맞이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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