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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 여긴 어디

송구영신 - 냉장고 정리

기념적 의미로 보관하던 것들을 떨어내다.

 

그래도 유통기한 1년 도래 전 조금씩 다 먹은 미트볼.

 

아내가 만들어 두고 간 두 통의 카레와 두 통의 짜장 중 마지막.

 

아이들이 좋아했던 아이스크림 마지막 한 개.

 

 

1년 가까운 시간동안 냉동고에 얼려두었던 순간들을 이제 녹여 보내준다.

그들이 녹으면 마치 내 안을 이루는 무언가가 녹아 없어질 것 같았던 불안했다. 나는 이제 강건해졌을까.

해법은 아직 찾지 못했고, 영구적 안정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오늘을 살아가야 한다.

 

어제를 돌아보며 내일을 생각하고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 매우 협소한 관점의 사고방식 같지만,

때때로 우린 발 밑을 비추는 호롱불 정도로 나를 밝히며 존재해야 할 때도 있다.

겨울이 오면, 여름처럼 뛰어다니지 않아도 된다. 그건 우리의 잘못이 아니라 자연의, 우주의, 인생의 섭리이니까.

순례자의 길을 걷는 제 1 원칙은, 나의 걸음에 맞춰 가는 것이다.

주변을 살피느라 시달렸던 나의 시간들, 그로 인해 보살피고 들여다 보지 못했던 나의 내면, 그 모든 허물을 살그머니 벗어

북해의 바람이 스쳐가는 창문 밖 처마에 걸어둔다.

그래도 사랑스러웠던 나의 삶이니, 나의 송구영신은 고치에 들어가기보단 불완전 변태를 선택하겠다.

 

새해라고 무슨 대단한 기운이 날 보살펴 엄청난 천운을 누리진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낙담할 일도, 약간 풀려간다고 자랑할 일도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이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 밖의 폭죽이 크리스마스의 밤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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