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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무국이었는데 감자국이 되는 시간

퇴근하고 집 문을 열면 아침에 벗어둔 슬리퍼가 나를 맞이한다.
마법이 사라진 지 3주. 13년, 또는 46년째 살아왔던 마법의 세계는 아직 곁에 있는 듯하다.

마법이 없으니 밥은 스스로 지어야 한다. 손을 씻고 냉장고부터 열어본다. 아, 배추가 남았다면 배춧국을 끓일 텐데.

무가 한 토막 있지 않았던가? 통을 열어보니 맛이 가고 있는 무 반쪽이 누워 시름시름한 표정으로 날 물끄러미 바라본다. 아쉬운대로 이 놈을 요리하자.

편수냄비에 750ml 정도 물을 붓는다. 대강 그 정도면 되겠지. 무가 너무 작아 뭘 더 넣지 싶다가 만만한 감자를 택한다. 다듬어 둔 감자를 다 써서 창고에서 한 알을 꺼내오다 보니 이 망할 것들이 깨알 같은 싹을 또 틔우고 있다. 오늘 다 깎아 냉장고에 넣어버려야겠다.

채소 다 다듬고 물 올려야 하는 룰을 어기고 물부터 끓인다. 저번에 뭔가 하느라 끓이다가 넘쳐서 덜어둔 육수를 그 위에 붓는다. 냉동실의 한알육수 1/3 조각도 넣는다. 간이 어찌 되는진 모르겠다.
감자 2/3알 정도 쓰려다가, 싹 파내고 난 것 다 썰어서 한 알을 넣는다. 아직 무 안 넣었는데... 왠지 방향이 감자국으로 꺾는 것 같은데. 무는 다음에 무국으로 쓸까 잠깐 망설인다. 근데 이 무 도저히 얼마 못 갈 것 같다. 그냥 썰어 넣자. 감자국이든 뭐든 모르겠다. 무 넣으면 시원한 감자국 되겠지. 썰다보니 속이 곯아서 반 정도 밖에 못 쓰겠다. 아주 갈변한 건 아니지만, 타지 독거생활 준칙은 '쓸데없는 위험 감수 금지'이므로 애매한 부분은 다 버린다.

보고 있자니 양파를 넣어야겠다. 반 알 썰어넣고 나니 마늘도 넣어야겠다. 다져 넣는 게 맞을 것 같은데, 그럴 시간이 없다. 이미 모든 재료가 순서 없이 들어가 부글대며 끓고 있다. 마늘은 최대한 잘게 채 썰어 넣는다.

뭐 빠진 거 없나... 밥 데워야지. 냉동실에서 얼린 밥 꺼내 전자렌지로 해동시킨다. 시간은 모르겠으니 그냥 3분. 오늘 모든 계량과 시간은 그냥 맘가는대로다.
아! 된장 넣어야지. 귀한 재료이므로 한 숟갈 일단 넣어 젓는다. 몇 분 뒤 간을 보니 대강 뭐 맞는 것 같다. 아니어도 더 넣을 순 없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나 모르겠으나, 감자를 잘라보니 잘 익었는데 무는 생각보다 안 익는다. 원래 무가 그런 재료인지 이 곳 무가 더 억센 건진 알 수가 없다. 안 찾아본다. 몇 분 더 끓이며 무가 어느 정도 물러진 것 확인 후 불을 끈다. 국이 아니라 찌개가 되어가고 있다.



이러고 나온 결과물을 가만 보니, 두부를 잊었고, 파 넣는 것도 깜빡했다. 하지만 밥에 곁들여 먹는 데 지장 없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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