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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난민을 시민으로 받아들이면 시민으로 취급해야 한다

난민과 이민은 다른 것이다.

더 위험한 이들이라거나 더 가여운 이들이라는 관점이 아니라, 인구로서 시민으로서 유입되는 과정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들의 법적 지위는 동일하다.

단, 인간의 기본권에 대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난민이 되는 건 자의적 선택이 아니고 크든 작든 박애주의 정책을 표방하는 국가 정부는 난민 수용을 통해 이를 실현한다.

정규 이민 절차를 밟을 수 없는 여건을 감안하여 별도의 트랙으로 처리해 준다는 것이다. 여기에 약간의 지원으로 불리한 첫걸음을 도와주는 것. 여기까지가 난민 수용의 틀이다.

그러나 그들이 기본적 정착을 마쳐야 할 일정 시기 이후에도 공공의 복지를 동일하게 부여하는 것이 정당할까?

 

사회주의적 정부 정책은 어느 나라에나 존재한다. 이는 일부 인권 측면의 해석에 따른 것이기도 하고,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빈익빈부익부 현상의 심화를 완화해 극단적 계층 분리가 일어나거나 충돌하는 파국을 피하는 실리적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누수가 발생하는 배관을 그대로 둔 채 파이프라인 전체에 무작정 펌프질을 계속하는 건, 정책 집행 당국의 배임이다. 사기업에서도, 잘못된 줄 알면서도 지속하여 손실을 초래한 경영자는 면책되지 않는다. 지금, 많은 나라들은 배임을 저지르고 있다.

그러기로 했으니까 그러는 게 아니라,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를 계속 돌아보며 맞는 방법과 방향으로 나아가는지 끊임없이 자기 성찰과 교정을 해야 한다. 그러라고 정부가 존재하는 것이다. 아니라면 국가 수립 초기에 법리 매뉴얼을 완성한 뒤 실무자를 제외하고 모두 해고해 버렸겠지. 그 어느 선장도 출항 지시 후 들어가 잠만 퍼 잘 수 없다. 근데 나라들은 왜 배가 산으로 가는데 정정하지 않는가?

 

이민자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근로 이민자는 그 사회에 기여할 것을 약속하고 유입 허가를 받는다. 거주 허가가 그런 것이다. 거주 허가는 취업 허가를 기반으로 하고, 취업 허가는 채용하는 고용주가 그 생산성과 기여도를 보증하는 채용 계약을 기반으로 한다. 그 약속을 저버리고 형편없이 굴어서 해고되면, 그 이민자는 취업 허가 요건을 잃고 뒤이어 거주 허가 요건도 잃어 추방된다. 그러므로 근로 이민자건 투자 이민자건 어떤 류의 이민자건, 이민 당국의 심사를 받고 적법 절차를 거쳐 유입된 이민자는 그 사회에 경제적 인구학적 문화적 기여를 할 것이란 상호 약조를 맺고 시작하는 셈이다. 실직은 유예 기간을 주겠지만 중범죄의 경우라면 지체없이 체류 자격이 박탈되는 이유다. 이는 어느 나라에서건 지극히 당연한 공통 상식이다.

 

정착의 기회를 만들어 온 이민자와 달리, 여건이 여의치 않았던 난민들은 어떤가?

그들도 보조금과 거주 지원을 받으며 새로운 시작을 한다. 언어 학습, 취업 알선, 기존 시민들이 기여하고 쌓아온 공공 자산을 함께 쓰며 안착의 기회를 받는다. 그런데 이 일엔 기한이 있는가? 그들은 다른 시민-이민자를 포함한 모두-들이 분담하는 기여에서 영원히 면책되는가? 그들의 내적 동기부여나 안착 능력의 편차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점은 기존 시민들 역시 마찬가지고, 기회의 평등이라는 사회적 규칙은 여전히 크든 작든 나름의 노력과 경쟁력을 요구한다. 충분한 시간이란 개념과, 충분한 노력이란 기준을 정의하지 않고 방임하는 박애주의는 종국엔 공동 사회에 배임이라는 해악으로 돌아온다. 살아만 있어 줘도 감사한 듯 사회 기여의 결과와 무관하게 언제까지나 물심양면 지원하는 정부를 보고 있노라면, 죽는 날까지 다 늙은 자식 뒷바라지 하다 눈 감는 그릇된 부모의 자식농사를 국민농사로 번역해 보는 듯 하다.

 

난민을 시민으로 받아들이면 시민으로 취급해야 한다.

그들을 계속 난민으로 여기면 그들은 시민이 될 수 없다.

아픈 내 새끼만 보살피느라, 나머지 새끼들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돌아보지 못하면 그걸 우린 콩가루 집안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