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당일배송 - 배려를 잊은 사회


유럽 대개의 나라가 그렇듯, 스웨덴도 여름휴가 기간이 길다. 주어진 연차 자체가 30일 가량 되는데, 법적으로 3주 이상 연속 사용을 의무화 해 사업주가 긴 휴가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법제화 해 놓았다.
그래서 당연히 실무적 차원에선 불편이 따르기도 한다. 일반 식당 같은 경우엔 이처럼 운영하지 않겠고, 오늘날 북유럽은 예전처럼 철저히 개인의 여가를 우선하지 않기 때문에 주말에 영업하는 마트도 많고 식당들도 많으며 늦은 시각 편의점들도 열려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제도권 규제가 직접 적용될 큰 회사들은 이런 긴 여름휴가의 원칙을 싫든 좋든 따르게 된다. 정규직이건 비정규직이건 마찬가지다.
 
이런 행태가 최근의 일은 아니니, 장기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회사에선 애초에 연말 연휴/휴가 기간에 대해서도 감안하지만 이 긴 여름휴가를 상당히 고려할 수 밖에 없다. 이는 관공서도 마찬가지인데, 완전한 업무 공백은 발생하지 않지만 피크 시즌인 몇 주는 실제 업무를 안 하는 것 같고, 나머지 앞뒤 기간에도 줄어든 인력이 담당하므로 익히 알려진 '긴 업무 처리 소요'가 발생한다. 이곳에 사는 주민들로선 이미 알고 있는 사항이라 큰 불만이 있는 것 같지 않다.
이들의 이런 관점은 여유롭고 관대해서가 아니다. 마치 겨울이 오면 추워지듯 여름이 오면 휴가 기간으로 여러 행정과 서비스들이 느려지는 것이다. 이건 '불평할 일'이 아닌 셈이다. 시대가 변해 이 곳도 배달과 즉각적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증가한다. 기다림의 미학이란 여의치 않은 상황에 붙이는 말이지, 그 누가 어떤 이유에서 기다리는 걸 더 선호하겠는가. 변하는 인프라의 성능과 유입된 외부 문화 때문에 스웨덴인들도 이제 기다림이 줄어드는 삶을 좀 더 보편적이고 좋은 것으로 여길 수 있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늘 예상을 한다. 아, 어쩌면 닫을 거야. 어쩌면 느릴 거야. 왜냐하면 "여름 휴가 기간이거든". 그리고 여기엔 아주 큰 전제가 붙는다. "그들은 휴가 기간일 거야. 나도 그렇듯이". 이 부분이 평등의 핵심이라고 난 생각한다.
 
누군가 휴가를 떠났을 때, 그것이 며칠짜리 병가든 몇주짜리 휴가든 수개월에서 일년에 이르는 육아휴직이든, 공석을 메우고 대처해야 하는 건 남은 사람들이다. 나도 처음에 의리나 책임감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팀이나 팀장이 왜 존재하는가? 회사는 쉼없이 돌아가는데 개인의 부재에 '대업'이 절뚝여서야 되는가? 하지만 내 눈에 그들이 이상하게 보였던만큼 그들 눈에도 내가 이상하게 보였음을 깨달은 건 한참 후였다.
적어도 그 공석이 예견되고 공지된 것이었다면, 혹 병이 난 것이라면, 자릴 비운 사람에게 뒷담으로 비난할 수는 없는 일이다. 누군가 욕하고 짜증내고 싶은 본능은 알지만, 그래도 꺼내어선 안 된다. 왜냐하면 그는 잘못이 없으니까. 잘못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나도 그럴 수 있기 때문'에. 여기서 우린 오래된 북유럽의 단어, 얀테의 법칙을 돌아보게 된다.
처음엔 이 표현이 '괜히 남 비방하지 마라, 너도 되맞는다'는 식의 몸사리기 태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삶에서 역경과 사건들은 느닷없이 찾아온다. 결과는 공평하게 일어나지 않지만, 확률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기에 결국은 공평한 건지도 모른다. 그러니 얀테의 법칙이란, '다른 사람, 주변 환경 얘기하지 말고 내 삶이나 열심히 살아라' 정도의 조언인 셈이다. 휴가를 갔든 휴직을 했든 퇴직을 했든, 상황은 닥쳤고 미리 알았으면 대비했을 것이고 어쨌건 현재에 맞춰 헤쳐가는 것이다. 누군가 주요 인물이 빠져서 곤란하게 되었을 때 "그가 돌아오면 다시 얘기하자"라 말하고 (쿨하게) 넘어가는 동료들을 보며 약간 황당하기도 했다. 급하지만 뭐 어쩔 수 없지 않느냐 식이었다. 어제 받은 이메일에선 "이번 주까지 결정을 못하면..."이라길래 "큰일나니 다들 정신 똑바로 차리세요"라고 이어질 줄 알았더니, "... 여름휴가 이후에 다시 회의해야 해요"라고 말해서 이처럼 너그러울 수 있나 싶었다. 대강대강 일하는 것도, 시간이 넘쳐나 여유로운 것도 아니지만, 닥친 상황을 대하는 태도는 분명 나의 각인된 정신세계와 다르다.
이쯤 되면, "숙제를 다 못했으면 끝까지 해내야지"라며 밤을 밝히는 학교에서 "소등시간이야, 남은 숙제는 내일 해"라며 불을 끄는 학교로 전학온 학생의 혼란과 유사하다. "오늘 숙젠데 내일 해도 되나요?"라고 묻고 싶지만 이들은 필시 "그렇긴 하지만 시간이 됐으니 어쩔 수 없잖아."라 답할 것이다. 이를 책임감에 결부시키는 것이 맞는가, 이젠 좀 확신이 없다.
 


가끔 한국 집으로 온라인 몰에서 주문을 하려다 보면 '당일배송' 내지는 '새벽배송'이라는 옵션이 보인다. 심지어 추가 금액도 없다. 쇼핑은 선택까지 오래 걸릴지언정 주문을 하고 나면 바로 손에 쥐어야 짜릿한 것 아닌가. 그래서 아직까지 오프라인 매장들이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그러한 본능 속에 당일배송, 특급배송, 로켓배송, 심지어 오프라인 매장에 왔다가 '바로드림'을 선택할 수 있게 해놓았는데 이를 거부하는 건 어리석음을 넘어 기이한 취향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나도 그런 소비자 중 하나로 오래 살아왔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아마도 물류 창고에서 심야와 새벽에 일하다 변을 당한 노동자들의 기사를 읽고 나서부터였을 것인데, 그 '당일배송' 라디오 버튼을 클릭하는 것에 가책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토록 급했으면 어제 주문했으면 될 것을, 왜 당일배송이 필요했을까. 어떤 온라인몰은 멤버십 가입비가 할인쿠폰보다 저렴했고, 즉각 개시된 멤버십은 배송료도 제외해 주었다. 똑똑하게 살라며 몇천원 깎아 사는 방안을 알려주는 기사와 영상들이 난무한데, 난 이 혜택의 이면에 누가 땀을 흘리고 목숨을 잃으며 고된 노동에 시달려야 하는지는 그다지 개의치 않고 살아왔다. 방금 결제했으니 내일 새벽에 도착하면 좋겠다는 그 가벼운 바람은 무엇을 희생할까. 내가 아니어도 어차피 그들은 노동할 거야, 운전할 거야, 오늘 밤 물류창고가 찜통이 되는 건 기후변화와 에어컨 없는 악덕 회사 때문이지 효율적 소비자인 내 탓이 아닐 거야, 이런 속마음은 손쉽게 '당일배송' 옵션으로 결제를 완료케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정말 그 결과에 기여하지 않는 걸까.
 
마약이 유통되는 건 유통하는 놈들 탓도 있지만 그걸 찾는 놈들 탓도 있다고 말한 게 나였다. 성매매가 횡행하고 더더욱 어린 아이들까지 끌어들이는 건 성매매를 하려는 놈들이 가장 큰 원인이니 매수자를 먼저 더 크게 처벌해야 한다고 말한 게 나였다. 그럼 당일배송, 새벽배송으로 스물네시간 일년 내내 돌아가는 물류 창고에서 시간급여 조금 더 벌어 살아보려던 노동자가 계속 일하고 일하고 일하다가 쓰러져 죽은 사건엔 내 기여가 전혀 없다고 말할 수 있나? 난 모든 물류회사가 당일배송을 점점 더 기본 옵션으로 추가하고 배송비 몇 백원 더 쥐어주며 누군가를 온종일 운전하고 오르내리고 지고 나르게 만드는 일에 아무 영향을 주지 않았나?
아니다. 난 책임이 있다.
 
당신도 책임이 있다.
 
한국은 빨리빨리 덕에 성장했다는 말을 하던 사람들은, 그 빨리빨리 속에 갈려나가 죽지 않아서 그 말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한다. 누군가는 그랬으니까. 고작 하루의 휴가를 얻어 첫 나들이 하던 어떤 가족의 모습을 뉴스에서 보고 다른 세계의 이야기처럼 낯설었던 기억이 있다. 한국은 뭐든 편리하고 빠르고 언제나 이용 가능하다고 칭찬하는 외국인들의 말을 들으면 가슴이 먹먹해야 한다. 그들을 그렇게 즐겁게 만들어준 누군가는 집에 가고 싶고 쉬고 싶고 가족이 보고 싶고 휴가도 떠나보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외국인 관광객들은 늘 소비자이니 '빨리빨리'를 즐기는 입장이겠지. 외국인 노동자들도 그 '빨리빨리'를 좋아할까?
그렇다면 그 '빨리빨리'는 우리 모두를 상징하고 대표하는 정신이 아니다. 그건 손님과 상사가 갑의 입장에서 누렸던 윽박의 역사가 남긴 흔적으로 보인다. 조금 과장해서, 가해자가 정의한 민족 특성을 피해자가 상징으로 쓸 이유가 있는가? 아니, 이제보니 이건 '조선인은 노예근성이 있어서 때려야 일 해'라 구전되던 일제의 망언, 혹 친일앞잡이의 망언과 흡사한 논리 아닌가? 언제 조선인이 스스로 그렇다고 말했나? 편의점 직원도, 노점상도, 직장인도, 운전기사들도 자발적으로 빨리빨리 살지 않았다. 그렇게 만들고 그렇게 자아를 정의받았다. 누가 자정에 편의점을 이용하고 당일배송 받으며 참 편리한 나라, 좋은 나라라 칭송한다면 되물어 보자.
 
당신이 매일 자정에 편의점에서 근무하고 당일배송 때문에 물류센터에서 일하며 새벽에 아파트 계단을 오르내리면서도 여전히 편리하고 좋은 나라겠느냐고.
 
나는 아니니까. 나는 소비자고 수혜자니까. 내 아이가 유기농을 즐길 수 있다면 이것이 아프리카 아동 착취에서 와도, 내 가족이 하루 일찍 즐거워 한다면 이것이 다른 가족의 한 사람을 새벽에 중노동 시켜도, 갑자기 당기는 야식을 먹을 수 있다면 이것이 누군가의 밤샘 일거리가 되어 온 몸을 망가뜨려도, 나는 면책되고 우아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나는 '배려'라는 단어를 다시 배워야 한다.
돈을 지불하므로 상대를 궁지에 몰아넣어도 된다는, 궁지에 몰린 상대의 입장은 그 개인의 책임과 결과이므로 마땅하다는 사고방식은 사회존립에 아주 위험하다. 귀족질을 하려는 개개인의 인품 문제를 넘어, 사회적 실리 측면에서도 지속가능하지 않다. 공동체는 유기적 존재다. 당신이 오른팔을 혹사시켜 완전히 망가뜨리게 되면, 이후의 몫은 오롯이 왼팔이 지게 된다.
 


나는 가끔 덧없는 옳은 일을 하고 싶다.
그것이 세상을 바꾸는 첫걸음이 될 거란 식의 생각 따위가 아니고,
그럼 나의 죄가 좀 씻기지 않을까 싶어서.
이것이 내가 누리는 이기주의다.



https://www.hani.co.kr/arti/economy/consumer/1207135.html 냉동대파 ‘쓱’ 주문했더니 ‘흐물’ 배송…SSG닷컴, 배달지연 원성

냉동대파는 소비자 좋으라고 얼린 게 아니라 유통업체 보관을 용이케 하려던 것이다. 그럼 애초에 이런 품목을 한여름에 올린 온라인몰이 원죄를 저지른 것이다.
파는 동네 마트 가서 사야지. 그 무게와 가격차가 얼마 한다고... 온라인으로 아이스크림 주문하는 것만큼 이해할 수 없다(나도 한 적이 있기에 반성하며 하는 말이다). 이런 상황을 막으려면, 온라인 배송 가능한 물품의 현실적 범주는 정부가 지정하는 수 밖에 없다. 잘난 자유시장경제는 탐욕을 이겨내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