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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채식주의자

"우리 회사는 다양성(diversity)을 받아들일 준비가 정말 되어 있나요?"

새로운 매니저와 첫 면담을 하고 회의실을 나오며 던진 나의 말에 그는 '좋은 질문'이라며 수긍을 했다. 그가 나와 같은 관점에서 이 회사의 다양성 지향이 뜻대로 되어가지 않는다 여기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현실의 괴리는 나와 생판 달리 살아온 토박이 스웨덴인에게도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한강 작가의 유명 소설 채식주의자를 난 읽어보지 못했는데, 꽤나 다독하셨던 아버지도 쉽사리 받아들이기 어려웠다는 말씀을 며느리에게 하셨던 걸로 보아 가볍게 읽을 소설은 여러모로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주워들은 토막글을 읽었을 때, 필시 그건 개인의 다양성을 존중 않는 사회의 폭력성을 고발한 소설이라 짐작을 한다. 그런 폭력성은 흔히 배타적 문화 감성에서 두드러지는데, 문화적 통일성을 생존과 번영의 중요 가치로 여기던 예전 문명의 시선은 생명 진화의 속도만큼이나 느리기 때문이리라. 그러니 그 긴 세월 동안 '다름'은 '틀림'과 동의어였고, 다른 말로 변절이었고 배신이었다. 성소수자를 향한 냉랭한 시선도 그와 다를 것이 없다. 수용하기 어려운 감정 역시 존중받아야 하지만, 이를 강제로 획일화 하는 과정에서 누군가는 고통스럽고 피를 흘린다. 그런 사회 병리를 삶으로 체득한 사람들은 가족의 고난을 막겠다는 구실과 진심으로 가장 가까이에서 첫 폭력을 행사한다. 고기를 억지로 먹이는 그 마음엔 그런 사랑도 회초리처럼 녹아 있긴 할 것이다. 비뚤어지긴 했지만.

이 시대 부모들은, 기성세대들은 청년들과 아이들에게 국제적 인재가 되라고 뜻모를 주문을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말하는 국제적인 면모가 무엇인지 과연 알고 있을까. 모호한 명제라는 물음이 아니다. 이율배반적 훈시였음을 깨닫는 그 날, 그들은 진정 국제적 심성과 가치관을 장착한 차세대더러 변절한 몹쓸 요즘 것들이라 손가락질 하지 않을까. 적어도 예전 조상 시대의 앞 세대들은 다음 세대에게 자신들을 따라 살라 가르치고 어긋나면 질책하기라도 했다. 지금 세대는 다르게 살라 북돋워 놓고선 달라졌다 힐난하는 것인가.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아야 하는 것만큼이나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아는 것도 중요하다. 비건이 되었건 비혼주의자가 되었건, 분노하고 들볶을 일이 아니다. 마음껏 너의 삶을 살라고 응원하던 목소리가 우리의 가식이 외친 게 아니었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