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야 여보, 그 때 파란 하늘에 맑은 날들도 많았어. 우리 그래서 시내 구경도 다니고 그랜나에도 갔었잖아."
아내의 말을 듣는 순간, 확 하고 기억이 되살아났다. 내가 출근해 정신이 없던 어느 날, 아내가 아이 둘을 데러고 스칸센 크로나에 갔던 그 날의 하늘도 청명하고 화사했다.
난 도대체 왜 지난 겨울이 온통 잿빛이었다 기억했던 걸까. 적어도 이 낯선 땅에 온 뒤로부터는 말이다.
강렬한 스트레스. 어쩌면 2017년 이후에 난 스스로 스트레스를 만들어 져 왔고, 그 정점이었던 지난 1월 피난민의 심정으로 식솔들을 데리고 차가운 밤 공기에 발을 내딛었던 이 도시의 하늘은 내 기억 속에 아무렇게나 칠해져 있던 모양이다. 그래서 난 그 빛깔이 나의 마음과 같은 잿빛이었다고 멋대로 새겨넣었나보다.
萬色唯心造. 만사가 내 마음에서 만들어지듯, 만사의 색깔 역시 내 마음에서 칠하는 게지. 같이 눈으로 보고도 기억에 접어넣을 땐 다른 색으로 채워넣었거나, 구멍이 숭숭 뚫린 기억만 대강 넣어놓고는 나중에 꺼내볼 때의 기분 따라 맘대로 칠해버리는 거겠지. 그래서 사실, 훗날이 되면 다른 색이 되기도 한다. 더 어둡기도, 더 밝아지기도.
하지만 굳이 맑았던 날을 흐리게 퇴색시켜 저장할 필요 있을까. 아직 내 마음의 여유가 부족해 그런 것이리라. 그럴 땐 함께 있던 누군가가 일깨워주는 말이 고맙다. 아니야, 그 날 우리 맑았어, 파란 하늘처럼, 이라고.
암흑 같은 겨울날을 대비하는 건 기대치를 낮추기에 좋은 전략이지만, 준비하는 시간을 가라앉힌다. 내일을 좀 더 밝게 느끼려고 오늘을 더 어둡게 느낄 필요는 없다. 내일만큼 오늘도 소중한 날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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