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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우린 새를 키운다

맘 약한 집이라는 소문이 퍼진 것일까.


약 3주 전 쯤, 에어컨 실외기 쪽에서 구구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냥 바깥 어딘가라고 생각했다.
화분을 잠시 내어놓으려고 잘 열지 않는 쪽 창문을 열고 내다보니, 비둘기 두 마리가 엉금엉금 실외기 아래로 피신한다. 조금 뒤 다시 열어제꼈더니 혼비백산 해 다른 곳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실외기 안쪽 빈 공간 구석엔 녀석들이 꾸며놓은 이끼둥지가 마련되어 있었다.

약 보름 전 쯤, 화분을 들여놓으려고 창을 열었더니 한 녀석이 구석에 앉아있다가 허둥지둥 다시 숨는다. 그리고 녀석이 있던 자리엔 하얗고 검은 점이 드문드물 박힌 알 두 개가 놓여있었다.
조금 뒤 내다보니 이젠 좀 용기가 난 건지 익숙해진 건지 미동도 않고 눈을 굴리며 구석에서 조용히 우릴 바라본다. 이제 돌이킬 수 없는 동거가 시작되었다.



약 일주일 전쯤, 갑작스런 비가 쏟아지던 날이었다. 창을 내다보니 비둘기 엄마는 자릴 피하지 않고 고개를 까딱 기울여 우릴 바라본다. 경계는 하지만 이젠 자릴 지킬 수 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남는 스티로폼 박스 뚜껑을 찾아 비가림 지붕으로 덮어주었다. 자꾸 떨어져서 할 수 없이 방충망은 닫지 않고 걸쳤더니 그럭저럭 도움이 되어 보인다.

지난 주말, 아내가 비둘기 둥지 부근에 솜털들이 보인다고 한다. 비는 그쳤지만 가림막이 있으면 덜 불안해 할 것 같아 그냥 놔두었다. 우리가 아침으로 먹던 식빵 한 조각과 플라스틱 뚜껑에 담긴 물 한 접시를 곁에 살그머니 놓아주었다. 어미는 잔뜩 긴장한 눈으로 내내 우릴 응시했지만 아마 속으론 별 생각을 다 했을 것이다.

어제, 아내가 나와 통화하다 베란다를 통해 엄마 아빠 비둘기가 교대하는 걸 봤다. 엄마가 나간 자리를 아빠가 지키러 들어온 건데, 아내가 창을 열어 내다보자 아비는 본분을 망각하고 실외기 아래로 숨어버렸다. 그리고 우리는 드디어 아기 비둘기의 모습을 처음으로 만났다.

조금 뒤 내 부탁으로 아내가 사진을 찍으러 다시 내다보자, 아빠 비둘기도 이젠 정신을 차린 건지 꽤나 거칠게 항의한다. 어미와는 좀 다른 모습인데, 녀석도 딴엔 남자라고 위용을 보이려던 걸까?
방해하지 않으려고 얼른 한 장을 남기고 그들의 공간에서 물러났다.


알껍질은 적을 피해 멀리 내다버린 걸까. 물은 마신 건지 마른 건지 바닥이 나 있었고, 빵조각들은 조금 더 둥지에 가깝게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아기 비둘기가 노란색임을 생애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길거리 부랑아들처럼 몰려다니고 지저분하고, 심지어 가끔은 버릇없다 여겨지던 도시의 폭주족 비둘기. 그들은 뒷골목 음식 찌꺼기를 탐내는 무법자가 되기도 하지만, 본래 이리 엄마 아빠의 성심으로 조금씩 낳아 태어나는 아기새에서 출발하고 있었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드라마를 살고 있듯, 그들도 마찬가지일까.



그들이 허구많은 집 중 왜 하필 우리 집을 찾아 온 건진 알 수 없다.
다만 그러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이 또한 인연이리라 생각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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