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워 중 단상. 잊기 전에 적는다.
단언컨대, 내 인생을 가장 극적으로 전환시킨 계기는 아이들과의 만남이다. 물론 아이들을 향한 내 태도를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그 영향은 정도가 달라지겠지만, 나는 적극적으로 임하고 싶었고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이 없다.
그 방법의 적정성과 효과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 노선을 지키는 대가는 설레면서도 가혹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하루의 절반을 떨어져 지내는 아빠가 그럴진대, 하루 스물네시간, 일년 삼백육십오일, 만 사년을 그리 살아온 엄마의 노곤함은 어찌 말로 다 풀어낼 수 있겠나. 아내의 인생 역시, 훨씬 더, 드라마틱하게 휘몰아치며 격정의 일기를 썼을 것임에 틀림없다.
생각지도 못했던 복병
그 두근거리고 녹아내릴 것만 같은 순간들로 가득한 육아 속에서, 나를 몹시 곤란하게, 고뇌하게, 괴롭힌 것들은, 놀랍게도 '전문가들의 의견'이었다.
의사, 육아 상담사, 유아 정신과 전문가 등으로 그 세를 나날이 더해가는 그 집단은, 하루가 멀다 하고 통계와 표준을 들먹이며 나를 심란하게 하였다. 나는 그 정보의 홍수 속에, 조언의 홍수 속에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고, 수많은 주파수 중 알아먹을 수 있는 채널을 하나쯤 잡았다 싶으면 쏟아지는 가이드라인으로 나 자신과 아이를 다그칠 새로운 규칙을 새겨들어야 했다.
좋은 취지였다. 듣고 보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들이었다. 스마트폰, 티비, 어른들의 대화, 아이를 대하는 태도. 때론 그들이 현실세계에 적용을 해보긴 한 걸까 싶을 정도로 원칙에 입각한 행동강령을 들고 나오는 통에, 머리로는 이해하나 마음으론 따라가기 버거운 내용도 많았다. 아이들도 사람이고, 무엇보다 나 자신도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원래 말을 안 들으려고 태어난다는 말도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면죄부가 주어지는 편이었다. 하지만 좋은 부모 되기에 출사표를 던진 이들에겐 해병대 캠프가 따로 없었다. 수면 시간이나 식사 시간, 배변 시간처럼, 포유류의 기본 본능조차 마음대로 충족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전제 조건이었다. 좋은 부모는 행복하고 바람직한 아이들을 키우기 위한 도구로 스스로를 내던져야 하는 것처럼 회자되었다. 부모님께 죄송하고 고마운 마음이 드는 건 그나마 건진 교훈이었다.
근데 이 전문가들은 역설적이게도 완전히 다른 소릴 또 하기 시작했다. 부모 마음이 행복해야 아이들도 행복해진단다. 고역을 참으랄 땐 언제고, 이젠 즐기기까지 강요받기 시작했다. 그 때 쯤이었던 것 같다. 이 사람들, 책으로만 배운 이야길 해 온 거구나 생각이 들었던 게.
약도 지나치면 독이 된다
어느 아이도 같지 않다며 개성을 인정하라 하고, 장애인을 편견 없이 평등히 대해야 하고,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이라며 다문화를 포용하라고 한다. 이 시대의 기치는 그렇게 너그럽다.
근데 내 아이를 키우는 부모에겐 '통계적 표준'을 강요하더라. 아이가 흠 없이 자라나길 바라는 부모에게 '당신 자식이 평균에서 좀 벗어났다'는 이야길 쉴 새 없이 한다. 정기적인 영유아 진단에서, 매일 받아오는 어린이집 일지에서. 아낌 없이 먹이고 키워왔는데, 통계라는 잣대는 엄정하기 그지 없다. 벗어나면 내 아이는 특별 관리 대상이 되고, 나는 반성해야 하는 부모가 되는 것이다. 인간의 기본 욕구까지 참아가며 인내해 온 부모에게, 정작 시련의 형벌을 내리는 건 '육아' 그 자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육아 정보를 생산해 내는 '전문가 집단'이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항생제 드릴까요?
이젠 부모가 의사도 되어야 하고, 육아 전문가도 되어야 한다. 전문가란 사람들, 결국에 가선 부모에게 선택권을 내밀며 고르게 한다. "전 조언을 했을 뿐인 걸요."
항생제처럼, 모든 전문가 조언은 결국 '적정선'을 산정해야 하는데, 그 결정권은 - 당연하게도 - 부모에게 있다. 그런 면에서, 요즘 세상은 전문가 집단에게 너무 과도하게 의존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스럽기도 하다. 그들이 경험적으로 얻은 귀납적 지식은 결국 '하나의 인생' 중 '일부 구간'에서 취득한 것이고, 연역적 도구를 통해 취합한 결과물은 타인의 결과에 바탕을 둔다. 사실 수많은 영향 요소들이 관여하는 육아야 말로 통계의 오류에 빠지기 십상인 분야인데, 이를 학계에서 전문적으로 연구한 이력 자체가 빈약한 마당에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은 매우 큰 도박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했다. 이들이 뱉어내는 소음으로부터 좀 벗어나 보자고. 나 역시 인간이고, 단 한 번 뿐인 인생을 살아가는데, 도구로서만 존재할 수는 없지 않느냐고. 무슨 숭고한 잉태를 하여 인류 구원의 선지자를 육아하는 것이 아니라면, 내 삶도 좀 돌아보자고. 부모들이 자식을 혼인시켜 엄마 아빠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만감이 교차할 또다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기껏 내 삶을 다해 키워놨더니, 또 다른 인생 키우는 데 제 삶을 다 바치고 앉은 셈이다. 이 무슨 만물의 영장 버전 쳇바퀴인가? 소기의 동일 목적을 훨씬 효율적으로 달성하는 아메바가 비웃어도 할 말이 없다.
최근 스트레스를 주로 받는 일은, 아이들을 일찍 재우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회사 일보다 이게 더 어렵고 성공율마저 낮다. 그 근본 원인은 물리적으로 아이들을 재우지 못하는 것도 있지만, "정말 옳은 일인가?"라는 질문을 계속 던지기 때문이다.
해질녘까지 놀이터에서 뛰어놀고 들어온 녀석들은 밤 10시, 11시가 되어도 깔깔대며 아빠 목에 매달리고 뒹굴려 한다. 이부자리 펴는 순간조차 썰매를 끌어달라는 둥 방해를 하며 놀이를 계속하려 한다. 아이들에게 놀이는 삶이다. 에너지가 남은 한 삶이 계속되듯 놀이도 계속된다. 그 놀이를 시계 바늘에 맞춰 멈추게 할 수 있나? 그렇게 해서 얻는다는 것들... 바람직한 수면 습관, 호르몬 분비, 다음 날의 이른 기상과 시간표에 맞춘 어린이집 등원... 정말 중요한 것들일까? 이렇게 놀고 싶어하고 웃고 싶어하는 아이들을 조용히 앉혀 책 읽게 만들고 취침에 진입하게 만드는 것이? 잠 잘 분위기를 만들어 루틴화 하라는 어떤 육아 정보는... 정말이지 '수면 최면'을 아이들에게 걸라는 주문처럼 들려서 조금 소름이 돋았다. 이런 조언을 하는 사람은 왜 없었을까?
'걱정마라. 졸리면 잔다. 그게 애들이다.'
정답은 하나 뿐일까
아버지 세대는, 정시 퇴근하여 집에 바로 온다 해도 예닐곱시였다. 그 땐 우리도 아홉시면 잠자리에 들었는데... 두세시간 동안 무슨 교감을 하며 유대감을 쌓았을까, 가끔 의아한 생각이 든다. 나는 그보다 두어시간 더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다. 목욕도 같이 하고, 밥도 같이 먹고, 책도 같이 읽고, 티비도 같이 보고. 낮에 놀았던 이야기, 친구들 이야기, 좋아하는 만화 이야기, 새로 배운 노래, 수업 시간에 만들어온 공작물도 함께 보며 얽힌 이야기를 듣는다.
내 욕심으로 아이들을 늦게 재우는 죄의식을 느껴야 할까? 아이들은 성장 호르몬이 부족해서 훗날 나를 원망하고 인생을 한탄할까? 전두엽이 망가져서 또래보다 공부를 못 하고 실패한 인생으로 귀결될까?
진정, 학식 높은 이들이 제시하는 솔루션이 정답일까?
육아란, 부모가 스스로를 믿어가는 과정
아직 아이들의 세계를 연구하는 어른들이면서...
아이들을 제어하려고 하는 것이 너무나 위태로워 보이고, 오만해 보인달까.
주먹왕 랄프가 그러더라. "난 악당이지만, 저 아이가 나를 이렇게 좋아하는데... 내가 나쁘면 얼마나 나쁘겠어?"
내가 아이를 사랑하는데. 내 아이가 행복해 하는데. 내가 여러가지 생각을 하며 스스로 판단해 가는데. 내 육아가 나쁘면 얼마나 나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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