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엔 일과처럼 우편함을 열어 본다.
날 찾는 이 없는 이 곳에서 가끔 날아드는 공문서, 때론 전단지조차 반갑다. 해당도 안 될 국제고등학교 안내물도 꼼꼼히 읽어 보고, 뇌신경 연구재단 기부를 부탁하던 우편물도 읽어 본다.
별 기대 없이 열어본 오늘 우편함엔 얇은 책자가 들어있었다.
군 모병 안내문인가? 번역기로 들여다 본 나는 기겁했다.
일단 표지가 너무 자극적이어서, 가방을 벗어 내려놓는 것도 잊고 읽을 수 밖에 없었다.
목차를 보니 일목요연하게 재난 상황 대처법을 안내해 주는데... 이게 자연재해가 아닌 전쟁을 전제로 한다는 게 기가 막히다.
아니, 휴전 상태의 국가에 태어나 평생을 살아 온 내가 이런 안내에 놀라서는 안 되지 않나 싶으면서도, 여긴 왠지 우리의 민방위 훈련과 달리 차분한 목소리로 "실제 상황이니 잘 들어라" 말하는 어조 같다.
지난 2년 간 받은적 없는 안내서이니, 정규 안내문이나 새로운 거주자 대상 안내문도 아니다.
나토 동맹 가입한 지 몇 달 안 되었으니, 최근 제작된 안내문이다.
이틀 전 화장지 새로 사서 좋아했는데, 지금 걱정할 건 수돗물이랑 변깃물인 듯... 톱밥 처리까지 신경쓰는 걸 보니 참 구체적이다. 이 정도라면 장기전을 대비하라는 메시지가 아닌가.
이거 교련 시간에 배웠던가. 난데없는 안내문을 받고 뒤숭숭한 마음으로 저녁을 지어 먹었더니 속이 얹힌 느낌이었다.
2차 세계대전 중립국 스웨덴도 격동하는 세계정세 속엔 평온을 유지하기 어려운 모양이다. 언제나 그렇듯, 중립이란 강한 힘을 가진 자만이 선언하고 지속할 수 있는 지위다. 내가 약해지든, 상대가 강해지든, 혹은 상대의 눈이 돌아가든, 힘의 균형은 늘 아슬아슬하게 비틀거리고, 또 쏠려 무너진다. 우린 어쩌면 스쳐가는 평화의 시대를 잠깐 맛 본 것 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이 영장류는 수십만년 중 후반 수천년을 매일 같이 서로 죽이며 살아오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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