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 여긴 어디

배움의 끝엔 무엇이 있을까

아로미랑 2023. 10. 22. 10:00

배움의 종류엔 두 가지가 있다.

나의 세계 너머의 새로움을 탐색하는 외적 학습, 그리고 나 자신을 포함한 내 세상 안에서 되새기는 내적 학습. 사실, 내가 선을 정하고 나만이 보고 느끼는 세상에 대해 되짚는 내적 학습은 결국 누군가가 완전히 이끌 수 없기에 더 오래 걸리고 답도 없기 쉽다.

내적 학습이란 나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끝없이 질문을 던지는 것이며, 나를 둘러싼 수많은 것들의 실체와 의미에 대해 진정한 이해를 하기 위해 수많은 각도에서 바라보며 내 감정을 읽어 소화해야 하는, 목표조차 뚜렷하지 않은 배움의 세월이다.
흔히 군대 같은 곳에서 무언가를 배운다면, 누리고 속했던 삶의 울타리를 처절히 느끼는 내적 학습에 가깝다. 유학길에서도 외적 학습을 목적으로 삼지만 삶의 기로에서 내적 갈등을 보살피고 이해하며 향후를 생각하는 내적 배움의 시간도 상당히 차지한다.

지금 나도 외적 내적 학습을 모두 이어가고 있겠지. 인간이란 평생 배우는 학생이라는, 배우는 인생이라는 그 단어의 뜻이 이제야 뇌리에 박혀든다.
근데 난 뭘 수업료로 내고 있는 것일까.

남들의 시선과 평가라는 짐을 내려 놓을 수 있는 기회다. 그러하니 속시원히 내 마음 속 목소리에 귀기울일 정적을 누릴 수 있다. 그러자 마음이 묻는다. 무엇을 원하느냐고.
내 표정을 살피던 마음이 다시 묻는다. 무엇을 두려워 하느냐고. 난 잃을 것들이 두렵다 답한다. 나의 하나 뿐인 자산, 인생의 시간이 아쉽다고.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망설임 없이 다시 살고 싶은 이 삶이 아쉽다고.
그러자 마음은 의아한 듯 다시 묻는다. 이미 너의 삶은 너의 것이 아니더냐고. 너의 뜻대로 살고 있지 않느냐고.

어려서, 어리석어서 나는 더이상 설명할 수가 없다. 그냥 고개만 가로젓는다. 내적 배움은 어차피 계속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난 이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 나의 평화로운 행복을 사진처럼 돌아볼 수 밖에 없겠다는 예감을 하고 있다.
때로 인생은 비가역적이다. 아니, 생각보다 대부분이 그러하다. 자기최면으로 날 마비시키기 전까지의 의식이 그리 말해주었다. 이제 감정의 감각신경을 끊고 다시 일상을 살 시간이다.

조금 걱정도 된다. 겨울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난 겨울잠 같은 우울의 수렁에 벌써 무릎까지 차올라 가라앉는 것 같다. 하지만 다짐한다. 멀쩡히 즐거이 사는 사람인척 하지는 않겠다고. 그건 나 나름의 인권이기도 하다. 난 침울할 권리가 있다.